“대화하다가 갑자기 멍해져서 불러도 대답을 안 합니다.” “몇 분 동안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가끔 정신이 순간적으로 끊기는 것 같습니다.”
진료실에서 이런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만날 수 있다. 많은 분들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혹은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떨어져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슷한 증상이 반복된다면 뇌에서 발생하는 발작의 한 형태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뇌전증이라고 하면 갑자기 쓰러져 온몸을 떨고 의식을 잃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모든 발작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뇌의 특정 부위에서 시작하는 국소발작은 잠시 멍해지거나 반응이 없어지는 것처럼 비교적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화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거나, 이름을 불러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입맛을 다시거나 입술을 반복해서 움직이고, 손으로 옷이나 주변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십 초에서 몇 분 후 다시 평소 상태로 돌아오지만 정작 본인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갑자기 이상한 냄새나 맛을 느끼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느낌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오거나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 뒤 잠시 의식이 흐려지는 환자도 있다. 이러한 증상은 다른 질환에서도 생길 수 있지만, 매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면 발작성 신경계 증상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이런 발작이 짧게 지나가기 때문에 환자 자신이 증상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의식이 흐려지는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 오히려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먼저 이상을 발견한다. “잠깐 사람이 멈춘 것 같았다”,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는 주변 사람의 관찰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또한 순간적인 의식 변화가 있다고 해서 모두 뇌전증인 것은 아니다. 실신, 저혈당, 수면장애, 편두통, 심장질환 등에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기억력 저하로 보이는 증상 역시 실제 건망증인지, 순간적으로 기억을 만들지 못한 발작성 증상인지 구분해야 한다.
따라서 증상만 듣고 스스로 뇌전증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정확한 원인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뇌전증은 뇌의 비정상적인 전기 활동과 관련된 질환이므로 뇌파검사를 통해 발작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특징적인 이상 파형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MRI가 뇌종양, 뇌졸중의 흔적이나 뇌 구조의 이상을 살펴보는 검사라면, 뇌파검사는 뇌의 전기적 기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역할이 다르다.
다만 짧은 시간 동안 시행한 뇌파검사가 정상이라고 해서 발작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작 사이에는 뇌파가 정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상이 반복되고 임상적으로 의심된다면 수면을 포함한 뇌파검사나 보다 장시간 기록하는 검사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특히 의식을 잃으면서 넘어지거나 다친 경우, 운전 중 또는 위험한 상황에서 정신이 끊긴 경우, 처음으로 전신 경련이 발생한 경우에는 신속한 평가가 필요하다. 한쪽 팔이나 다리에 힘이 빠지거나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이 지속된다면 뇌졸중과 같은 다른 응급 신경계 질환도 확인해야 한다.
잠깐 멍해지는 증상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거나, 그 시간의 기억이 사라지고, 주변 사람이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단순한 피로나 건망증으로만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뇌전증은 반드시 쓰러지고 몸을 떠는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다. 짧고 반복적인 의식 변화가 뇌가 보내는 중요한 신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증상이 반복된다면 신경과 진료 필요한 뇌파검사를 통해 원인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안전한 일상을 지키는 첫걸음이다.